‘기획재정부=설계자’, ‘보건복지부=장물아비’, ‘종합조사표=종합조작표’
1842일의 농성을 함께한 김주영의 9주기, 그러나…
26일, 여의도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장이 있는 이룸센터 앞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위원회’ 등의 주최로 고 김주영 활동가 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서는 종합조사표 화형식이 거행됐다. 사진 강혜민
“김주영이 죽었을 때도 지금과 같은 대선 시기였습니다. 당시 문재인 후보가 빈소에 조문하고 갔어요. 자신이 집권하면 더는 이런 억울한 죽음 만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가 당선되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야 문재인 정부가 집권했습니다. 집권 4년이 지났는데 그 약속 지켰습니까? 김주영이 죽은 지 9년이 됐어요.
문재인은 지난 3년 동안 우리 삶을 가지고 사기 쳤습니다. 설계자는 바로 기획재정부입니다. 종합조사표로 점수 나오면 예산 드니깐, 기재부는 점수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지부는 기재부한테 받은 조작된 점수를 장애인에게 팔아먹었습니다. 활동지원 24시간이 보장되지 않아서, 탈시설이 권리로 인정되지 않아서 장애인은 여전히 시설에서 살아갑니다. 동지들, 장애등급제를 ‘진짜 폐지’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김주영 10주기 때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분노를 모아 ‘종합조사표 화형식’을 하겠습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기획재정부=설계자’, ‘보건복지부=장물아비’, ‘종합조사표=종합조작표’라고 적힌 세 개의 드럼통에 차례대로 불이 붙었다. 김주영 9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장애인들은 ‘서비스지원종합조사표’가 인쇄된 종이를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종합조사표 화형식이 거행됐다. 종합조사표를 불태운 손들은 곧이어 김주영의 영정 앞에 바치는 하얀 국화를 들었다. “우리를 더이상 죽이지 마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김주영의 영정 앞에 장애인 활동가들은 고개를 숙였다.
26일, 여의도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장이 있는 이룸센터 앞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위원회’ 등의 주최로 고 김주영 활동가 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에, 장애인 활동가들은 그의 영정 앞에서 다시 한번 투쟁을 결의했다.
여의도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장이 있는 이룸센터 앞에서 진행된 고 김주영 활동가의 9주기 추모제. “우리를 더이상 죽이지 말라”고 적힌 9주기 현수막이 보이고 그 아래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 “문재인 정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2012년 10월 26일 새벽, 중증장애여성 김주영 씨가 활동지원사가 없는 사이 발생한 화재에 질식해 사망했다. 당시 그는 보건복지부가 주는 최대 활동지원시간을 받고 있었으나 그 시간은 하루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은 장애인 활동가들에게 ‘얼굴 모르는 이의 죽음’이 아니어서 더 절망적이었다. 그는 죽기 전날,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을 사수한 활동가였고, 활동지원제도화를 위해 함께 투쟁한 동지였다.
“김주영은 우리가 처음 광화문농성에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서, 농성 과정에서 죽었으며, 영정이 되어 1842일을 함께 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되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는데, 우리는 촛불이 오기도 전부터 광화문 지하차도에서 투쟁했습니다. 그때 대통령 후보들은 중증장애인의 안전한 삶,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들 지켜졌습니까?
등록장애인 260만 명 중 12만 명 밖에 활동지원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12만 명 중 복지부가 주는 최대 시간인 하루 16시간 받는 이들이 전국에 열 명도 안 됩니다. 복지부 시간이 부족하니 서울시만 해도 이삼백 명에게 추가로 지원해서 24시간 보장하고 있는데, 중앙정부는 뭐하고 있습니까? 이명박, 박근혜와 다르다고 선전해온 문재인 정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박경석 이사장)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기획재정부=설계자’, ‘보건복지부=장물아비’라고 적힌 종이박스가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기획재정부=설계자’, ‘보건복지부=장물아비’, ‘종합조사표=종합조작표’라고 적힌 세 개의 드럼통에 불이 붙은 모습. 김주영 9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장애인들은 ‘서비스지원종합조사표’가 인쇄된 종이를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사진 강혜민
2019년 7월에 시작된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는 1842일간 이어져 온 광화문농성의 성과였다. 그러나 장애등급제 폐지의 최종 목표는 ‘필요한 만큼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라’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반쪽짜리 성과였고 장애인들은 ‘가짜 폐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히나 활동지원서비스를 판정하는 새로운 판정도구인 종합조사표는 오히려 최중증장애인들의 활동지원시간을 갈아먹었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활동지원 수급자격 갱신을 신청한 5만 7370명 중 8333명(14.5%)의 서비스 시간이 삭감됐다. 월평균 22시간, 많게는 241시간까지 서비스 시간이 감소했는데, 특히 과거 장애등급제 시절 인정조사에서 1등급이었던 최중증장애인의 17.2%가 시간이 삭감됐다. 따라서 장애계는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정부가 장애인복지예산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장애유형별·특성별 추가 시간을 반영하고, 무엇보다 활동지원 24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예일꾼 박준 씨의 추모 공연. 주변 장애인 활동가들이 곧 불태울 종합조사표를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광화문농성을 하면서 아무 성과 없이 농성을 끝내게 될까 봐 많이 두려웠지만 싸우니깐 변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다”라면서 “광화문농성 중단한 지 4년이 지났지만 농성장의 위치와 형태만 변했을 뿐, 우리는 계속 싸워왔다”고 말했다.
이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장애등급제 진짜로 폐지하고, 장애와 가난 때문에 세상 떠나는 사람이 없는, 반차별을 넘어선 평등이라는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을 그리며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이원교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 또한 “우리들의 요구를 쟁취하는 그 날이 되어야 김주영에 대한 추모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김주영 활동가의 어머니는 “부모로서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죄스러울 따름이다. 자식 먼저 보내고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많이 부끄러운데 아직까지 살아 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여러분들도 용기 잃지 말고 계속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어머니는 딸의 영정 앞에 향을 피워 올리며, 사진 속 딸의 얼굴에 깃든 그리움을 아주 느리게 어루만졌다.
고 김주영 활동가의 어머니가 딸의 영정사진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사진 강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