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3차 시범사업 시작
1, 2차 시범사업 문제점 아직 해결 안 돼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의사들
장애계 “의료진 교육 필요하다”
황인준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는 집 근처 병원에 건강주치의 진료를 받으러 방문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병원은 휠체어 이용자인 황 활동가의 접근성 보장을 위해 이동식 경사로를 설치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황 활동가가 병원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진 황인준
“아직 건강주치의 진료를 한 사례가 없어서 시스템이 없어요. 오셔도 진료 못 보실 것 같은데요.”
“휠체어 타세요? 죄송한데 저희 병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원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저희 병원은 건강주치의 안 해요.”
“건강주치의 제도가 거창한 게 아니고, 다른 환자랑 똑같이 일반진료받는 거예요. 제대로 된 진료받으려면 큰 병원 가세요.”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병원에 문의하자 들은 말이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이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지 3년이 훌쩍 넘었지만 의료진은 이 제도에 무지하다. 지난 4월 발표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567명 건강주치의 등록의사 중 실제 활동기록이 있는 사람은 단 88명뿐이다.
건강주치의 사업에 참여한 장애인 당사자 수도 매우 저조하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차 시범사업에 참여한 중증장애인은 1146명이다. 이는 전체 중증장애인 98만여 명의 0.1%밖에 안 되는 수치다.
제대로 되지 않은 의료진 교육, 홍보 부족으로 인한 낮은 이용률 등 때문에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은 장애계로부터 ‘유령사업’, ‘실패한 사업’ 등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 와중에 장애인 건강주치의 3차 시범사업이 이달 말 시작될 예정이다. 주 장애관리 서비스가 정신·발달장애 유형까지 확대되고 방문서비스도 연 12회에서 18회로 늘어났지만 위와 같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3차 사업도 0.1%만 이용하는 유령사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들과 장애인권운동단체 활동가들은 1일 오후 2시, 최혜영 의원실 등 주최로 열린 ‘장애인건강주치의사업 현황과 장애인 당사자 사례발표회’에서 증언과 제언을 이어가며 현행 사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백인혁 활동가가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최혜영 의원실 유튜브 캡처
- 있으나 마나 한 건강주치의 사업… 장애인 건강 질 더 나빠졌다
장애인 건강주치의는 중증장애인 당사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당사자의 건강관리 능력 향상을 지원하는 사람이다. 또한 필요할 경우 다른 전문분야와 협력하며 당사자의 건강관리 계획을 조정·지도한다.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은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 16조에 근거해,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로 2018년 5월부터 시행됐다.
장애인에게 건강주치의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비장애인보다 건강상태가 더 열악하기 때문이다. 2014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건강상태가 나쁘다고 응답한 장애인은 53.4%였다. 비장애인 16.6%보다 3배 이상 높다. 또한 만성질환 보유율도 장애인(77.2%)이 비장애인(34.9%)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장애인 1인당 평균 1.8개의 만성질환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장애인의 건강관리와 의료접근성 향상에 대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이 시작됐지만 유명무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이 진행된 3년간 장애인 건강지표는 사업시행 이전보다 되레 하락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장애인 건강검진 수검률은 2011년 45.93%에서 2018년 43.07%로 감소했다. 병원진료가 필요한데 병원에 방문하지 못한 ‘미충족 의료율’ 경험은 2014년 19.1%에서 2020년 32.4%로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홍보가 부족해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올해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장애인 약 84%가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을 모른다고 답했다. 전혀 알지 못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55.3%,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용을 모른다고 응답한 사람이 28.8%에 달했다.
이민호 다릿돌센터 활동가와 성영주치과 병원직원과의 통화 내용. 이 활동가가 건강주치의 사업을 문의하자 병원직원이 “아직 시범사업이라서 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사진 이민호 활동가 발표자료 캡처
- 건강주치의 진료 문의했더니 “잘 모르는데요”… 진료거부도 다반사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은 왜 있으나 마나 한 유령사업이 됐을까.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한자협)가 올해 4월부터 전국 장애인 건강주치의 의료기관 89개소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의료기관은 이 사업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고 심지어 이 사업을 모르기까지 했다.
한자협 조사에 따르면 건강주치의 의료기관으로 등록된 곳 중 무려 70%(62개소)가 장애인의 건강주치의 사업 내원상담을 거부하거나 사업을 중단했다. 의료기관은 ‘건강주치의 사업 이용률이 저조하다’,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업을 중단하며 중증장애인 당사자의 진료요청에 책임감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서울시 노원구의 한 의료기관에서는 ‘다른 환자가 너무 많다’, ‘원장님 건강이 좋지 않다’ 등의 이유로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의료기관의 43%(38개소)는 해당 의료기관이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참여 기관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병원에 문의전화를 걸었을 때 제일 먼저 전화를 받는 간호사가 주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시 성북구 의료기관에서는 ‘처음 듣는 얘기다’라고 답변했고 경상남도 통영시 의료기관에서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건강주치의 진료를 시행하지만 책임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엉터리로 진료하는 곳도 있었다. 부산의 한 의료기관에서는 ‘건강주치의 진료는 일반진료랑 다를 게 없다, 진료비 할인혜택 정도만 있다’고 답변했다. 인천 의료기관에서는 ‘이 사업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기초 혈액검사를 받으면 전화로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검사비 2만 원을 청구하기도 했다. 현행 시범사업은 건강주치의가 환자에 대한 건강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맞춤형 상담을 제공하도록 하나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선영 복지부 장애인정책과 과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 최혜영 의원실 유튜브 캡처
- 장애계 “의료진 교육해야”… 복지부는 “의사 인센티브” 거론에 그쳐
백인혁 한자협 활동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달부터 시작될 3차 사업에서도 결코 유효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3차 사업에서는 주 장애관리 대상이 확대되고 방문서비스도 늘어났으나, 의료진이 무지하고 무책임한 태도가 고쳐지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될 수 있다.
백인혁 활동가는 정부가 의료기관을 교육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백 활동가는 “건강주치의 활동이력이 적거나 없는 주치의에게 사업이행을 지시해야 한다. 또한 간호사, 의사 등 의료기관 관계자 전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진료거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매뉴얼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은 보건복지부가 민간 의료기관의 사업참여를 독려하는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게 의료기관의 의무가 아니다 보니 정부의 사업이행 지시, 매뉴얼 강화 등 강제성을 띠는 정책시행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날 사례발표회에 참여한 이선영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과장도 “의사에게 인센티브를 줘서 사업을 활성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도로 답변하는 데 그쳤다.
백인혁 활동가는 장애인 건강주치의 사업의 홍보가 강화돼야 한다고도 제언했다. 백 활동가는 “각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지역 내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안내 등 장애인 당사자에게 적극적으로 정보가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 누리집을 개선해, 발달장애인을 비롯해 모두가 알기 쉽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각 의료기관의 장애인편의시설 확인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민지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