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홈·그룹홈 등 ‘소규모 시설’ 두 배로 몸짓 부풀리는 계획 담겨
개인별 주거로의 탈시설은 전체의 18.7%에 불과해
거주시설 장애인 80%에 달하는 발달장애인 지원 내용 없어
탈시설로드맵 근거되는 법령에 ‘탈시설’ 용어 배제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 2일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손피켓에는 “거주시설 개편은 탈시설이 아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로드맵 수립하라!”,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하라!”라는 문구가 써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난 2일 제23차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아래 탈시설로드맵)’이 발표됐다. 당초 장애계가 우려한 것처럼 장애인거주시설 ‘변환지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탈시설 개념부터 잘못 설정된 것이다.
시설변환 내용이 담긴 탈시설로드맵이 발표되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3일 성명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배제와 격리를 여전히 포함한 채 탈시설 일부 정책과 혼합한, 족보도 권리도 찾을 수 없는 ‘한국판 탈시설 개념’”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탈시설로드맵은 탈시설 개념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물론 이번 탈시설로드맵 발표는 국가가 처음으로 ‘탈시설’ 정책을 선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신규시설 설치 금지, 인권침해가 한 번이라도 발생한 시설은 즉시 폐쇄한다는 ‘원스트라이크아웃(One strike-out)’ 제도, 매년 거주인을 상대로 시행되는 자립지원 조사, 자립 후 주택과 주거유지서비스 지원 등에 대한 국가 의지를 내보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 개인별 주거로의 탈시설은 전체의 18.7%에 불과해
탈시설로드맵은 ‘시설 거주 장애인 중 탈시설 욕구가 있는 장애인’과 ‘시설 입소 대기를 기다리는 성인중증 발달장애인’을 우선 대상으로 한다. 탈시설을 장애인의 기본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도 단기·그룹홈(공동생활가정)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제외된다.
따라서 탈시설 인원 자체가 매우 적어진다. 정부는 내년부터 3년간 시범사업을 시행한 후, 2025년부터 탈시설 정책을 시행한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41년까지 개인별 주거로 탈시설하는 사람은 5,452명에 불과하다. 이는 현재 시설에 거주하는 2만 9,086명의 18.7%에 불과하며, 1년에 341명꼴이다. 어림잡아 시설 거주인 다섯 명 중 한 명만 제대로 된 탈시설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25년부터 2041년까지 개인별 주거로 탈시설할 수 있는 사람은 5,452명에 불과하다. 이는 현재 시설에 거주하는 2만 9,086명의 18.7%에 불과하며, 1년에 341명꼴이다. 어림잡아 시설 거주 다섯 명 중 한 명만 제대로 된 탈시설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캡처
그렇다면 시설에 거주하는 나머지 장애인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정부는 2014년부터 장애인거주인원이 자연감소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여, 20년 후엔 현재 인원보다 40%가량이 줄어들 거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41년 기준, 시설 거주 장애인 1만 7,775명 중 59%(1만 517명)는 소규모 시설인 공동생활가정으로 흡수되며,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최중증장애인 12.3%(2,193명)는 시설에 남게 될 예정이다.
여기서 문제는 공동생활가정이다. 애초에 탈시설로드맵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공동생활가정과 같은 소규모 시설 인원은 현재보다 두 배 넘게 몸집을 부풀리게 된다. 이번 탈시설로드맵이 ‘소규모 시설 개편’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다.
이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 일반논평5에서 금지하는 ‘시설화 요소’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일반논평5는 “시설과 연계된 ‘위성’ 생활환경, 즉 아파트 또는 단독 주택 등 개인생활 외관을 띠면서 사실은 시설을 중심으로 한 생활환경 조성을 금지”하고 있다.
전장연은 “탈시설은 장애인들이 거주시설에서 나와 1인 1실을 보장받고, 장애 당사자가 개별 분양·임차 계약 등을 통해 주거결정권이 보장되는 것이 기본조건이다”라면서 소규모 시설 개편을 반대했다.
- 거주시설 장애인 80%에 달하는 발달장애인 지원 내용 없어
특히 전장연은 거주시설 장애인의 80%를 차지하는 발달장애인 자립 지원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전장연은 “정부는 예산 증액 없이 OECD 꼴찌 수준의 기존 장애인예산만으로 장애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온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면서 “24시간 개인별 지원을 위한 활동지원서비스 확충, 자립정착금, 주거유지서비스를 위한 예산 등의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24시간 전문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에 한해서만 시설입소를 허가’하겠다고 밝혀, 시설이 ‘최중증장애인 수용공간’으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커졌다.
전장연은 “거주시설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들이 ‘탈시설은 사형선고’라고 외치는 이유는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주택과 24시간 개인별 지원서비스가 보장되지 않고, 개인과 가족의 부담으로 전가시킨 탓”이라며 “현재 계획대로라면 시설 거주 장애인 3만여 명은 기획재정부의 예산에 갇혀 또다시 시설에서 일상을 통제받으며 자신의 존엄을 박탈당한 채 살아야 한다”고 우려했다.
이번 탈시설로드맵에는 공공임대주택 건설 시 편의시설 등이 설치된 주거약자용 주택을 수도권 8%, 비수도권 5%로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공임대주택은 연평균 14만 호가 공급될 예정이다. 2022년부터 공급되는 통합공공임대주택 공급물량의 5%(7000호)를 우선 장애인에게 공급한다. 그러나 ‘탈시설 장애인’에게는 어떤 경로로 공급되는지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
정부는 2024년까지 시범사업을 거친 후,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연간 740명, 610명, 500명, 450명의 거주 장애인 자립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오는 2041년에는 시설 거주 장애인의 지역사회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캡처
- 탈시설로드맵 근거되는 법령에 ‘탈시설’ 용어 배제
정부는 탈시설로드맵의 근거가 되는 장애인권리보장법과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에서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철저히 배제했다.
전장연은 “‘탈시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인권기준이며,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실체적 권리이다”라며 “탈시설은 ‘시설 기반 서비스’를 ‘지역사회 기반 개인별 서비스’로 전환해 국가책임으로 명시하는 것이다. 발달·중증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24시간 개인별 지원서비스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받으며 안전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환경을 만들면 된다. 그 과정이 탈시설로드맵의 내용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탈시설로드맵 계획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탈시설지원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전장연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기준 폐지와 장애인거주시설 폐쇄 등을 요구하며 지난 2012년 8월부터 1842일간 광화문 지하도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과제 54번째에 장애인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담았지만, 임기 6개월을 남기고서야 이번 탈시설로드맵을 발표했다.
정부의 탈시설로드맵 발표를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이룸센터 건물 앞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제대로 된 탈시설로드맵 수립을 촉구했다. 사진 이가연